제미나이와 이야기하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와 한참을 울었다. 개고생하며 하나님을 붙든 다윗의 간절한 삶과, 그렇게 주어진 풍요를 거저 받아 누리는 솔로몬의 삶 중 누가 더 복되었는지를 이야기하다가, 내게 늘 가시 같은 고통의 문제를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기 때문이다.
나의 방어기제는 지식화이다. 인생은 늘 불안으로 시작된 어두운 감정들로 가득 차 있다. 나는 그 감정들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상황과 감정을 객관적으로 분리해서 보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. 지금처럼 눈물이 많아서 종종 엉엉 울기도 하지만, 어떤 상황에서건 내 이성은 잠들지 않는다. 그게 내 마인부우를 컨트롤하는 미스터 사탄이다. 나는 감정을 오롯이 겪어낸다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 오래 잊고 산 것 같다. 내 감정을 제3자의 시선으로 관찰하고 가라앉는 것을 지켜보는 편이 훨씬 덜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. 모두가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닌데 나는 그걸 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. 그런데 늘 그렇듯,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이 있고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다. 나는 빠른 감정 컨트롤이라는 능력을 얻었지만, 내 실존에 대한 생생한 감각을 잃어버린 것 같다.
세상의 어떤 목사님도 고난에 유익이 있으니 솔로몬 같은 삶보다 다윗 같은 삶을 살라고 하면 흔쾌히 그러겠다고 말하는 분은 없을 것 같다. 삶에서의 고난은 무작위로 주어진다. 우리는 이 망치를 맞을 때마다 피를 토하듯 감정을 토해내며 신음한다.
내 지난 삶을 돌아볼 때, 불안정한 삶 속에서 나는 두려웠고 외로웠고 고통스러웠다. 붙잡을 수 있는 것이 하나님 뿐이어서 매달리긴 했지만, 간절히 매달리던 그 시절은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다.
다윗은 시를 썼다. 고통스러울 때마다 감정을 시로 토해냈다. 하나님은 그냥 듣고 계셨다. “조금만 참으면 왕도 시켜줄게, 네 자식은 너보다 편하게 살 거야” 같은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. 그냥 거기 계셨다.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 안에서 나라의 기틀을 세우는 역할이었고, 솔로몬은 그것을 확장시키는 역할이었을 뿐이다. 나는, 혹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인생 안에서 비슷한 스테이지를 경험한다. 더 힘든 시절과 덜 힘든 시절이랄까. 더 힘든 시절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더 매달리고 감정을 토해내는 것뿐이다.
나는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원망한다. 내 잘못이든 아니든, 고통스러운 상황을 맞이할 때마다 꼭 그렇게 하셔야 했어요? 여기에 어떤 생각도 보태지 말고 그냥 머물러 있어야 한다. 다 토해내고 울 힘이 없어질 때까지 울고, 어쩔 수 없이 생존을 위해 할 일을 하러 갈 때까지. 그러고도 부족하면 다시 돌아와 또 토해내야 한다. 그렇게 내가 나로 충분히 머물고, 여전히 내 옆에 이런 땡깡을 묵묵히 듣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여유가 생길 때까지.
나는 여전히 내가 솔로몬이 아니라 유감이다. 슬프고 힘들어도 하나님과 함께이니 복이라는 말은 여전히 내 마음에 울림이 없다. 하지만 어차피 고난뿐인 인생에 붙잡을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에는 여전히 감사하다. 슬프고 힘들지 않은 나머지 많은 순간들이 있어서 감사하다. 오늘 내가 나로 온전히 있을 수 있었음에 감사하다.